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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러 오신, 영원하신 우리 왕”

From Emmanuel to Always

강영훈 목사
삼위일체 주일 · Year A · 2026년 5월 31일
마태복음 28:16–20 (개역개정)

마태복음과 함께 걷는 길
성령강림절 후 · Year A
성령강림
삼위일체 섬기러 오신, 영원하신 우리 왕 5월 31일
연중시기

첫 마디와 마지막 마디

모든 위대한 이야기에는 첫 마디와 마지막 마디가 있고, 가장 훌륭한 이야기에서는 마지막 마디가 첫 마디에 응답합니다. 복음서 기자들 가운데 가장 치밀한 건축가인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그런 두 개의 괄호 사이에 지었습니다. 첫 마디는 꿈속에서 옵니다. 잠든 요셉 위의 고요 속으로 천사가 한 이름을 말합니다 — 임마누엘,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복음 1:23). 그 아이는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 많은 칭호를 얻게 되겠지만, 천사가 그를 위해 말한 첫 마디는 덕목도 직분도 아닙니다. 자리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마디는 스물여덟 장 뒤, 한 산 위에서 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열한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복음서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는 끝난다기보다 열린 하늘로 잦아듭니다 — 부활하신 주님은 여전히 거기 서 계시고, 그분을 듣는 법을 배우는 모든 세대 속에서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두 괄호 사이에서 — 임마누엘과 ‘항상’ 사이에서 —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산상수훈, 비유들, 십자가, 빈 무덤. 스물여덟 장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주일에 그 괄호가 닫힙니다 — 감상으로도, 작별로도 아니고, 한 이름 위에서. 삼위일체의 이름 위에서. 구유에서 산까지 함께해 오신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아버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아들, 그 사귐을 살아 있게 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교회는 그 이름 속으로 세례받은 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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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

산 위에 모여 무릎 꿇은 사람들
경배하면서 흔들리면서, 단 하나뿐인 그 산 위에서.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습니다. 마태는 산을 사랑합니다. 산상수훈, 변화산, 시험의 높은 전망 — 이 복음서의 모든 산은 무언가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제 맨 마지막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따르는 이들을 산 하나로 다시 부르십니다. 마태는 그 산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산’이라고만 씁니다. 마치 이제는 의미 있는 산이 단 하나뿐이라는 듯이. 그 아낌 자체가 하나의 신학입니다. 이 산은 차를 몰고 갈 수 있는 언덕이 아니라,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입니다. 말씀이 펼쳐지는 모든 예배당이 그 산이 됩니다.

그 산이 어디 서 있는지도 보십시오 — 예루살렘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갈릴리입니다. 다만 이제 그들을 부르시는 분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거기 모인 이들이 누구인지 보십시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태복음 28:17). 그들은 두 마음인 채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 호흡 안에서 경배하며 흔들렸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 흔들림이 멎기를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다 정리되거든 다시 오라 하지 않으십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들에게로 오십니다. 그분이 함께 서시는 교회는 완성된 믿음의 교회였던 적이 없습니다. ‘충분한’ 믿음의 교회입니다 — 산에 오를 만큼, 마음이 머리를 앞질러 무릎 꿇을 만큼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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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름 속으로

물속에서 빛을 향해 올라오는 모습
그 한 이름 안으로 옮겨진 사람들.

바로 그 확신 없는 무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당신 사명의 심장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한 이름 — 단수입니다 — 세 위격이 나누어 지니신 이름. 그리고 세례는 사람에게 그 이름을 표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합니다. 그 사람을 그 이름 안에 내려놓습니다. 물에서 올라온다는 것, 혹은 아기의 머리 위로 그 물이 부어진다는 것은,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 세상을 존재로 부르신 아버지의 사랑 안으로, 십자가에 가셨고 살아나신 아들의 생명 안으로, 세대를 건너 교회를 살아 있게 하시는 성령의 사귐 안으로.

이것이 세례받은 삶의 가장 깊은 사실입니다. 어떤 성취보다, 어떤 실패보다, 어떤 감정보다 깊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생명 안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도 — 의심도, 실패도, 살면서 겪은 최악의 목요일 밤도 — 그것을 무를 수 없습니다. 세례를 되돌리는 예식은 없습니다. 한번 주어진 이름은, 붙듭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표가 붙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 안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 무엇도 한 영혼의 세례를 무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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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 마디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처음 들으면 새 약속처럼 들립니다. 사실은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약속이, 새 목소리로 말해진 것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로 돌아가 보십시오. 미디안의 도망자 목자 모세가, 타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그 가운데서 여호와의 음성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애굽기 3:12). 보내심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홀로 바로에게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음성이 세기를 따라 계속 말씀하십니다. 약속의 땅 어귀의 여호수아에게 —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여호수아 1:5). 성전은 무너지고 땅은 잃어버린 유배지의 이스라엘에게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이사야 41:10). 거기서도. 모든 정황이 하나님은 떠나셨다고 주장할 때에도.

하나님은 누군가를 보내실 때마다 함께 가십니다. 홀로 보내진 사람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산 위에서 하신 일은, 그 오랜 문장을 당신의 입술에 올려 시제를 바꾸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모세에게, 유배자들에게 말해졌던 그 약속이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일인칭으로 말해집니다.

네 복음서 기자 가운데 마태만이 승천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구름도 없고, 들려 올라감도 없고, 닫히는 문도 없습니다. 복음서는 그저 산 위의 예수님으로 끝납니다. 여전히 서 계시고, 여전히 말씀하시고, 여전히 현존하시는 채로 — 그 퇴장의 부재가 바로 마태의 요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우편에 좌정하신 그 그리스도가 지금 당신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기억이 아니고, 멀리서 따르는 가르침의 목록도 아니고, 현존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이들과 언제나 동행해 오신 그 방식대로.

삼위일체 주일은 결국 이것에 관한 날입니다. 형이상학 퍼즐이 아니고, 추상적 완전 속에 떠 있는 멀리 계신 세 위격도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함께 머무시는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문법입니다 —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떠나지 않으셨고,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으며,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숨 쉬고 계심을 고백하는 교회의 언어. 그 현존 바깥의 날은 없습니다. 책상 앞의 월요일 아침도, 외로움이 날카로워지는 저녁도, 병실도, 말 없는 부엌 식탁도. 최악의 날도, 최고의 날도 아닙니다. 항상 — 모든 날, 하루도 빠짐없이 — 현존이 마침내 뵈옵는 것으로 바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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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가 닫히다

산 위에서 열린 하늘을 향해 선 모습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렇게 복음서의 괄호가 닫힙니다. 처음에 임마누엘, 끝에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산 위에서 그 괄호는 삼위일체의 이름 위에서 닫힙니다 —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한 하나님, 한 이름, 세 위격 — 산을 오른 모든 흔들리는 경배자를 품기에 충분히 깊은 은혜의 바다.

교리를 먼저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 위의 열한 사람도 풀지 못했습니다. 한 호흡 안에서 경배하고 의심했는데, 그래도 사명을 받았습니다. 요구되는 것은 통달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음입니다 — 산 위에 서는 것, 무릎을 꿇는 것, 그리고 흔들리는 경배자들을 세우시는 주님이 다음에 올 무엇 속으로도 함께 가시리라 믿는 것. 잠든 사람 위에 말해진 한 이름으로 열린 이야기는, 유효 기간 없는 약속으로 닫힙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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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는 기도

사랑의 아버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존재로 불러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아들이여, 우리는 세례로 그 이름을 지니고 삽니다. 사귐을 지키시는 성령이여, 우리가 흩어지려 할 때 우리를 붙들어 하나 되게 하십니다 — 우리가 세례받아 들어간 그 이름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흔들리는 중에도 우리를 보내 주시고, 약속하신 대로 모든 날에 우리와 함께하여 주십시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뵈올 그날까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섬기러 오신, 영원하신 우리 왕” · 삼위일체 주일, Year A · 2026년 5월 31일

트리니티 연합감리교회 · 뉴멕시코주 로즈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