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불, 내마음에 스며와”
강영훈 목사
부활절 셋째 주일 · Year A · 2026년 4월 19일
누가복음 24:13–35 (개역개정)
잘못된 방향
그들은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날 오후,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올랐습니다 — 공동체로부터, 빈 무덤으로부터, 감당하기에 너무 큰 소식으로부터 십일 킬로미터를 멀어지는 길이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기에 마땅한 날이었는데, 그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낯설지 않은 걸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그 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 꼭 믿음을 잃어서가 아니라, 산산이 부서진 뒤에 오는 탈진 속에서. 믿던 것이 깨어지고 나면 본능은 움직이라고 말하는데, 그때 움직임의 방향은 떠난다는 사실보다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발걸음을 맞추시는 하나님
한 낯선 이가 길에서 그들과 합류합니다.
누가의 서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절제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광채 속에 도착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알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들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시고, 좋은 길동무가 그러하듯 그들의 슬픔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 답을 가진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질문을 가진 동료 순례자로.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누가는 묘한 한 구절을 덧붙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헬라어는 신적 수동태입니다. 그 가림은 그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알아봄이 유보된 것은, 그것이 마침내 올 때 시각이 아니라 더 깊은 앎으로 — 머리보다 마음에 먼저 닿는 앎으로 — 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부수적인 묘사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떠나가는 이들을 만나시는 방식의 문법입니다. 대화를 끝내 버리는 계시로가 아니라, 대화를 이어 가는 현존으로.
천천히 붙는 불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은 성경을 여시고, 율법과 선지자를 지나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 길고 긴 궤적 전체를 제자들과 함께 걸으십니다. 그 궤적은 죽음을 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죽음 속으로 들어가시는 하나님을 향해 휘어 있습니다. 길은 움직이는 십자가 신학의 세미나가 됩니다.
그들 안에서,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누가가 마음의 뜨거움에 쓴 헬라어 — 카이오메네(kaiomenē) — 는 현재 시제이고 수동태입니다. 불이 붙여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이 붙인 것이 아닙니다. 다른 무언가가 일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그 불은 번개처럼 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늘의 빛이 번쩍이고 한 음성이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동행자들은 소리만 들었습니다 — 천둥인지, 새소리인지, 붙들 수 없는 무엇. 그 순간은 갑작스러웠고, 틀림없었고, 전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에게 불붙음은 더 느립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존 웨슬리라는 젊은 성공회 사제가 — 그 자신의 고백으로는 “몹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모라비안 집회에 갔습니다. 누군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훗날, 감리교의 기억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을 남깁니다. “아홉 시 십오 분쯤 전,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환상도 없었습니다. 음성도 없었습니다. 믿는 이들 가운데서 소리 내어 읽힌 성경 — 그리고 그가 붙이지 않은 불이 있었을 뿐입니다.
같은 불은 수천 개의 더 작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수백 번 들어 온 성찬 예식 한가운데서 일어나기도 하고, 누구도 대단하다 하지 않을 예배당에서, 어깨 위에 가만히 얹힌 나이 든 교우의 손을 통해 오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끝내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 부재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대개 떠나 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신 순간은,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인 경우가 드뭅니다. 뜨거움이 먼저 오고, 알아봄은 나중에 옵니다.
떼심에서 알아보다
제자들이 마을에 이릅니다. 낯선 이는 더 가려는 듯하고, 그들은 그를 붙듭니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그분이 들어오십니다.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리고 누가의 초대 교회 청중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었을 네 개의 동사로 —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동사들입니다. 평범한 식탁에서, 평범한 저녁 식사에서, 결국 낯선 이가 아니었던 낯선 이에 의해 베풀어진 성찬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흉터 있는 손으로 떡을 떼시는 데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 그리고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누가복음 24:31 (개역개정)
그분을 알아보는 순간, 그분은 사라지십니다. 거두어진 것이 아닙니다. 놓여난 것입니다. 누가가 말하려는 요점은 신학적이면서 동시에 목회적입니다. 부활절 이후, 눈에 보이는 예수는 그리스도를 아는 형식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얼굴을 마주하고 식탁 건너편에 앉아 계신 끝나지 않는 만찬은 없을 것입니다. 있을 것은 펼쳐지는 말씀, 모이는 공동체, 떼어지는 떡입니다. 그리스도는 계속 거기서 만나집니다. 언제나.
달려가는 증언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 누가복음 24:33 (개역개정)
절망 속에 예루살렘을 떠나 걸었던 제자들이, 이제 어둠 속을 달려 돌아갑니다. 길은 같습니다. 방향이 뒤집혔습니다. 불이 다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발에 무언가를 합니다. 후퇴를 사명으로 바꿉니다 — 모든 질문을 해결해서가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의 절박함을 다시 써서.
대부분에게 이 달음질은 밤길 십일 킬로미터의 모습을 하지 않습니다. 더 소박하고, 더 값비싼 모습을 합니다. 멀어져 가던 친구에게 보내는 월요일 아침의 문자 한 통.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일. 일 년째 소식 없는 자녀에게 거는 전화. 그 달음질은 영웅적으로 보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언제나, 돌아섬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이 이야기 안에 숨은 부르심입니다. 답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육신의 눈으로 본 것도 아닙니다. 어떤 모양으로 왔든 그 뜨거움을 느꼈다는 것 — 그리고 그것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 놓인 길
어느 순간이든, 대부분의 삶 어딘가에는 엠마오 길이 있습니다. 무너진 직장. 진단. 감당하도록 지어지지 않은 무게에 짓눌리는 결혼. 인정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엷어져 버린 믿음.
누가복음 24장의 약속은 그런 길이 짧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혼자 걷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올바른 답이 도착하기를 목적지에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다. 누가 떠났다고 예루살렘에 남아 서운해하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곁에 계십니다 — 뒤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불이라 이름 붙일 무언가를, 침묵 속에서 열고 계십니다.
결국 엠마오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남기는 것은 깨어 있음입니다. 발걸음을 맞추어 오는 낯선 이를 향한 조용한 주의. 차가운 줄도 몰랐던 마음을 데우는 말씀에 귀 기울이려는 마음. 그리고 마침내 그 불이 이름을 얻을 때, 발을 돌려 달려갈 은혜. 그분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 곁에 발걸음을 맞추시고, 그들이 알기도 전에 불을 붙이시는 하나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