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마른 내영혼, 샘솟는 생명수”
강영훈 목사
사순절 셋째 주일 · Year A · 2026년 3월 15일
요한복음 4:5–42 (개역개정)
누구에게나 자꾸 되돌아가는 우물이 하나씩 있습니다. 습관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고, 버티는 방식일 수도 있고, 약속한 것을 끝내 건네주지 않은 오래된 야망일 수도 있습니다. 가고 또 가서, 두레박을 내리고, 길어 올릴 수 있는 만큼 길어 올리면, 잠시는 살아집니다. 그러나 언제나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 물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어딘가에서는, 앞으로도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한낮에 우물로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빈 항아리를 안고, 이번에는, 어쩌면, 채워질지도 모른다고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제게 필요했던 것은 인정이었습니다 — 성과에 대한 인정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 공군에서 전투기를 몰던 일도, 가르치던 일도, 안수를 향해 가던 일도 — 그것마저 어떤 세상의 성취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인정을 길어 보려던 우물이 되었습니다. 신학교 시절, 저는 하나님이 이끄신 우물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우물들로 손을 뻗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한낮이었습니다. 수치의 열기, 나라는 사람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부르심이 어쩐지 충분치 않다는 느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한낮에 — 하루 중 가장 뜨겁고 가장 훤히 드러나는 시각에 — 사마리아 야곱의 우물에 이르십니다. 한 여인이 홀로 물을 길으러 옵니다. 다른 여인들과 함께하는 서늘한 아침이 아니라, 아무도 없을 시각에. 그녀는 사람을 피하고 있습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은 깊이 반문화적입니다. 유대 남자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 그 시대 문화가 넘을 수 없는 선으로 그어 둔 민족의 경계와 성별의 경계를 한꺼번에 건너시면서.
그분은 설교로도, 책망으로도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짧은 한마디로 시작하십니다.
“물을 좀 달라”
— 요한복음 4:7 (개역개정)
구약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무언가가 꿈틀해야 합니다. 낯선 이가 우물가에서 물을 청하는 장면은 히브리 성경에서 가장 알아보기 쉬운 무늬 중 하나 — 혼약의 장면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만난 방식이고, 야곱이 라헬을, 모세가 십보라를 만난 방식입니다. 남자가 타국의 우물에 이릅니다.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옵니다. 남자가 물을 청합니다. 그리고 그 주고받음에서 언약이 태어납니다. 요한의 1세기 청중은 이 무늬를 즉시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 그리고 아연했을 것입니다. 상대가 사마리아 사람, 모든 경계의 저쪽 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평생 온전함을 찾아 헤맸습니다 — 다섯 번의 결혼, 그리고 언약의 보호가 없는 지금의 동거. 관계 하나하나가, 이번에는 물이 오래가기를 바라며 길어 올린 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낯선 이가 우물가에 앉아, 조상들이 들려주던 모든 혼약 이야기를 메아리치게 하는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라 버릴 청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영혼의 꺼지지 않는 목마름을 꺼 주실 신랑으로 —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 자신을 내놓고 계십니다. 단번에, 영원히.
예수님은 대화의 방향을, 그녀 손의 두레박에서 그녀 영혼의 통증으로 돌리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요한복음 4:10 (개역개정)
여인은 이 말을 듣고 두레박의 논리로 생각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요.”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 완전히 요점을 비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을성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주어지고 있는 것을 아직 볼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언제나 참을성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삶의 진실을 — 다섯 번의 결혼 전부와 지금의 동거까지 — 정죄의 기색 하나 없이 이름하십니다. 그녀의 목마름의 온 이야기를 보시고, 심판이 아니라 생수의 제안으로 응답하십니다. 복음에서 거의 무엇보다 중요한 구별이 이것입니다. 무기로 쓰이는 진실과, 약으로 건네지는 진실의 차이.
저는 그 구별의 양쪽에 다 서 보았습니다. 자라는 동안 제 아버지는 진실을 칼처럼 휘둘렀습니다 — 제 실패들을 외과의사의 정밀함으로 짚어 내면서. 언제나 기술적으로는 정확했습니다. 언제나 피를 냈습니다. 그래서 저의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매를 각오하고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러나 매는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런 음성이 왔습니다. 나는 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그리고 내게는 너에게 줄, 마르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내미시는 것입니다. 훈계가 아닙니다. 죄 목록이 아닙니다. 생수 — 사람의 영혼 안을 흐르는 하나님의 생명, 속마음의 사막을 적시는 성령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한복음 4:14 (개역개정)
여인은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의 오랜 예배 논쟁을 꺼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누구의 예배가 옳은 예배인가? 누구의 전통이 진리를 쥐고 있는가?
예수님의 대답은 인간의 종교가 그어 온 모든 경계선을 단숨에 가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 요한복음 4:23 (개역개정)
이 산이 아닙니다. 저 성전이 아닙니다. 이 교단이 아닙니다. 저 전통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제가 공부해 본 모든 전통을 지나며 배운 것이 있습니다. 모두 유익하고, 모두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교리 체계든 하나님을 향해 먼 길을 데려다줄 수 있는 틀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너무 꽉 쥐면, 창이 아니라 담이 됩니다. 영 없는 진리는 굳어 율법주의가 되고, 진리 없는 영은 풀어져 감상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말씀과 영이 만납니다 — 그리고 예배는 지리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됩니다.
저는 하나님이 바로 여기, 트리니티 연합감리교회에서 — 예루살렘에서도 멀고 그리심산에서도 먼 이곳에서 — 그 일을 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교리의 항목을 빠짐없이 채우는 예배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진실을 말하는 예배입니다.
절정은 지금도 제 숨을 멎게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 “내가 그라.” 그러자 여인의 반응은 즉각적입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갑니다. 버려진 물동이는 강력한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을 만나면, 옛 필요의 그릇들은 소용을 다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피해 한낮에 우물로 왔던 그 여인이 동네로 달려 들어가 외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그녀는 신학에 통달했다고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간증을 — 그리스도와의 자기 자신의 만남을 — 나눌 뿐입니다. 그러자 온 동네가 응답합니다. 수치로 고립되었던 사람이 구원의 다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끊임없이 하십니다 — 밀려나고 부서진 사람들을 데려다가 구속의 악기로 삼으십니다.
저는 이것이 참말인 것을 압니다. 신학교 시절, 코네티컷의 작은 교회가 저에게 그렇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의 문 앞에 선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무언가에 목말라하며. 그리고 그들은 조건 없이, 이렇게 말해 주는 사랑을 내밀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네 존재 자체를 기뻐하신다. 그 사랑에게 발견되었을 때, 저는 빈 항아리를 버려두고 왔습니다. 더는 세상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믿음에 이릅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들었음이라.” 그녀의 간증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들 자신의 만남이 그 문을 확정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목말라 있습니다 — 그칠 줄 모르는 애씀에, 깨어진 약속들에, 오래된 상처에, 혹은 그저 너무 오래 엉뚱한 우물에서 길어 마시느라 진짜 물맛을 잊어버린 데에. 이 본문의 약속은, 예수님이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의 우물가에서 — 한낮이라 해도 —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청으로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을 좀 달라.” 그분은 우리 위에 서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곁에 앉으십니다.
어떤 밤에는 츄이를 데리고 뒷마당에 나가, 함께 트램펄린 위에 올라 그냥 눕습니다. 열린 하늘 아래서 — 별똥별을 세고, 그 모든 빛을 하나하나 걸어 두신 하나님께 소원을 소리 내어 말하면서. 별들은 신학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포 속에서, 생수가 다시 차오릅니다. 속마음의 사막이 물을 머금습니다. 평화가 돌아옵니다 — 문제들이 풀려서가 아니라, 근원을 기억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목마름을 일부러 우리 안에 지으셨습니다. 벌로서가 아니라, 귀소 신호로 — 우리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큰 것을 위해 지어졌다는 일깨움으로.
어제엔 용서를, 오늘엔 기쁨을, 내일엔 소망을
그것이 생수입니다. 하룻밤에 모든 것을 고쳐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우물들이 못 하는 일을 합니다. 안에서부터 솟아오릅니다 — 당신을 새롭게 하고, 지탱하고, 당신이 닿는 모든 삶으로 흘러넘치는 샘으로.
여인은 물동이를 우물가에 두고 떠났습니다. 더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물동이를 두고 떠날 용기가 있기를 빕니다.
기도
한낮의 만남의 하나님, 가장 예상하지 못한 시각에, 가장 감추고 싶은 모습 그대로의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 — 우리는 목마른 채로 나아옵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너무 오래 엉뚱한 우물에서 길어 마시느라 생수의 맛을 잊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끄러워 청하지도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를 만나 주십시오. 우리 위가 아니라 우리 곁에 앉아 주십시오. 재판관의 잔인함이 아니라 치유자의 다정함으로 우리 삶의 진실을 이름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르지 않는 물을 — 안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샘이 되는 그 물을 — 주십시오.
하나님 대신 우리가 섬겨 온 우물들을 — 인정, 명망, 통제, 안락을 — 용서해 주십시오. 물동이를 버려두고 일어설 용기를 주시고, 옛 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 주신 새 생명을 안고 우리의 마을로 걸어 들어가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우물가의 여인처럼 만들어 주십시오 — 모든 것을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 정직과 경이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와서 보라. 그분이 내게 하신 일을 와서 보라.
우물가에 앉아 목마른 모든 영혼에게 생수를 내미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