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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폭풍우 가운데에서도 나 주를 찬양하리”

Tempted, Yet Faithful

강영훈 목사
사순절 첫째 주일 · Year A · 2026년 3월 1일
마태복음 4:1–11 (개역개정)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 · 사순절 여정
재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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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광야가 있습니다. 기도가 침묵과 만나는 자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부재만 만져지는 자리. 그것은 풍경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입니다 — 철저히 혼자라고 느끼면서도 믿음을 붙들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태. 마태가 말하는 광야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례 직후,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방금 하늘이 열렸습니다. 방금 아버지의 음성이 말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쉼표도 없이, 성령은 방금 이름을 받은 그 아들을 사십 일의 굶주림과 침묵과 시험 속으로 이끄셨습니다. 이름이 먼저 왔습니다. 그 이름의 시험이 곧바로 뒤따랐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빚어지는 바로 그 무늬입니다. 하나님께 이름을 받는 것과, 그 이름이 인간 경험의 온 무게로 — 고난으로, 시험으로, 응답 없는 기도의 침묵으로 — 시험받는 것. 이름은 그렇게 실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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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o the Wilderness — sermon illustration
광야로

제가 이 무늬를 아는 것은, 제가 그것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잔인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그 아버지는 오늘까지도 무자비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날, 내 아버지 말고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 나를 바라보시며 “너는 내 것이다. 너는 내게 소중하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 처음 알았을 때, 제 안 깊은 곳의 무언가가 안도감으로 터져 열렸습니다. 그때 이렇게 생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닐 줄 알았어.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 소중했던 거야.

그것이 저의 세례의 순간 — 제가 이름을 받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가 뒤따랐습니다. 기도와 눈물의 세월을 지나며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의 그 관계의 아픔에서 저를 꺼내 주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했고, 울었고, 도와 달라 매달렸지만, 침묵은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받은 이름은, 그 이름과 모순되어 보이는 현실에게 시험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네 아버지라면, 왜 상처는 아물지 않는가?

저는 믿게 되었습니다. 교과서가 아니라 긴 경험의 길에서요. 하나님은 오래전에 죽은 것도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기대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치유는 지금 오는 중이며, 우리 눈이 닿는 경계 너머를 지나오고 있다는 것을. 저는 그 확신을 붙들고 있습니다 — 어떤 날은 두 손으로, 어떤 날은 겨우.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사십 일 금식 후에 광야에 서 계셨던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자리에서 정체성을 공격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셨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하러 온 일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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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시험은 흔히 빵에 관한 것으로 잘못 읽힙니다.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마귀는 가장 깊이 벨 자리에 정확히 조건문의 힘을 얹으며 시작합니다 —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요단강에서 선언된 그 정체성이 지금 광야에서 심문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림이 자신을 정의하게 두실 것인가? 자신을 이름하신 아버지를 신뢰하는 대신, 신적 능력으로 자신을 지키실 것인가?

저는 이 시험을 속속들이 압니다. 다만 제게는 돌과 떡이 아니라 전화 한 통과 연봉으로 왔습니다. 공군을 떠나 목회의 길로 들어설 때, 저는 막 결혼해 가정을 꾸린 참이었습니다. 바로 그 갈림길에서, 한 항공사로부터 경력 조종사 채용 제안을 받았습니다 — 먹여야 할 새 입들이 생긴 초보 아버지가 밤에 잠 못 이루며 떠올릴 만한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머릿속의 그 목소리는 마귀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더없이 합리적으로 들렸습니다. “잠깐 돌아가는 것뿐이야 — 길지 않아. 목회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잖아. 그리고 사람들이 너를 커리어의 실패자로 그만 여기게 되면 좋지 않겠어?”

그 목소리는 빨리 떠나 주지 않았습니다. 몇 해를 두고 돌아왔습니다 — 고지서가 날아올 때마다, 살림이 조여들 때마다. 그 삶을 가질 수 있었는데. 첫째 시험은 정확히 이렇게 일합니다. 배신이라고 자신을 알리지 않습니다. 상식의 옷을 입고 도착합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마태복음 4:4 (개역개정)

그분은 필요가 충성을 눌러 이기게 두지 않으셨고, 식욕이 정체성을 정의하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교훈은 유대 광야에서만큼이나 지금도 절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누구라 말씀하시는지가, 형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실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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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시험은 수위를 높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번에는 자기가 성경을 — 시편 91편을 — 인용합니다.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시리라. 발가락 하나 다치지 않으리라.” 그 심장부에 있는 것은 과시의 시험입니다. 신실한 무명(無名) 속에서 정체성을 살아 내는 대신, 세상의 무대 위에서 증명하고 싶은 욕망.

신학교 시절, 저는 정확히 여기에 빠졌습니다. 내가 내 부르심보다 크다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명망 있는 진로로 향하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생각했습니다. 신학교 다음에 로스쿨은 왜 안 되지? 박사학위와 대학교수 자리는 왜 안 되지? 더 많은 돈, 더 많은 힘, 더 많은 존경, 더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원했습니다. 저는 성전 꼭대기에 서서, 무언가 화려한 것 속으로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신실한 목회의 일은 충분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로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 마태복음 4:7 (개역개정)

참된 믿음은 실제이기 위해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애초에 걸어 두신 적 없는 점수판으로 삶을 재며, 보이는 성취로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아래 살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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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험은 가장 뻔뻔합니다. 마귀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대놓고 제안합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십자가 없는 통치. 고난 없는 권세. 신실함 없는 승리.

교회는 이 제안의 제 나름의 판본을 끊임없이 마주합니다 — 거룩한 것을 편리한 것과 맞바꾸려는 시험. 나라 안팎의 정치적 불안정은 힘만이 유일하게 통하는 화폐라고 속삭입니다. 많은 교회가 늘어나는 지출과 줄어드는 수입, 멈춰 선 성장, 섬기려는 젊은이의 부족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 한가운데로 시험이 옵니다. 교회도 세상이 재는 방식으로 자신을 재야 하지 않겠는가 — 숫자와 영향력과 시류를,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좇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3절로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 마태복음 4:10 (개역개정)

나뉜 충성은 없습니다. 세상을 약속하고 공허를 배달하는 권세들과의 타협도 없습니다. 중요한 유일한 척도는, 그 이름을 말씀하시는 분을 향한 신실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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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sting — sermon illustration
시험

이야기의 나머지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안수받은 목회를 그만두려던 그 신학교 시절, 저는 한 달에 한 번 작은 교회를 찾아가 어린이 사역을 돕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사랑은 죽은 지 오래라고 스스로를 설득해 둔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 저를 잘 알지도 못하고, 저에게 아무런 의무도 없던 그들이 — 제 학업을 후원했고, 비자를 도왔고, 아직 낯선 사람이던 우리 가족의 필요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천사들이 온 곳이 거기였습니다. 영광의 광채 속이 아니라, 산꼭대기가 아니라, 작은 교회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사랑은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증명했습니다. 제 부르심은 제가 가장 기대하지 않던 바로 그 자리에서 되살아났습니다. 마태는 마귀가 떠난 뒤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기록합니다. 저는 천사들이 지금도 온다고 믿습니다 — 가족이 되어 주는 낯선 이들의 손을 통해,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를 통해, 계속 걸어갈 이유가 바닥난 바로 그때 도착하는 뜻밖의 은혜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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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gels Came — sermon illustration
천사들이 나아와

광야가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배우려 든다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름받은 채 광야로 걸어 들어가셨고, 그 정체성이 확증된 채 걸어 나오셨습니다 — 시험이 쉬웠기 때문이 아니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빚어져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무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름을 받고, 삶이 그 이름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붙들면, 우리는 저편으로 나옵니다. 말끔하지 않게, 아무 일 없지 않게 — 그러나 빚어진 채로.

제가 이것을 아는 것은, 제가 그것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잔인한 아버지는 누구를, 무엇을 신뢰해야 하며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공군의 혹독하기 그지없던 훈련의 세월은 저를 거의 부러뜨렸지만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일에서의 엄격한 학업의 세월은 저를 거의 짓눌렀지만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동료 누구도 원하지 않던 작은 시골 신앙 공동체들을 섬기는 일은 어떤 강의실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가르쳐 주었고, 어떤 명망 있는 파송보다 빠르게 저를 단련된 목회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광야들 하나하나가 저를 빚었습니다. 그 시험들 하나하나가, 제 스스로 믿을 힘이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이 제 위에 말씀하신 그 이름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제가 하는 모든 일을 빚는 확신은,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불로 시험받은 것입니다.

어제엔 용서를, 오늘엔 기쁨을, 내일엔 소망을

우리는 휘어집니다. 눌립니다. 넘어집니다. 그러나 완전히 부러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더 강해져 가고 있으며, 견뎌 내는 시험 하나하나마다 삶과 믿음을 보는 눈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집니다.

그것이 광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서 꺼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통해 우리를 빚으신다는 것. 침묵이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이 때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이 벼려지는 바로 그 도가니라는 것.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시고도 신실하셨던 그분은 멀리서 지켜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십 일의 굶주림과 침묵과, 지혜의 옷을 입은 거짓말들을 붙들고 통과하실 수 있었다면 — 그분의 은혜로, 우리도 붙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름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빚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광야도 — 어떤 마귀도, 어떤 의심도, 어떤 침묵도 —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는 광야를 아는 사람들로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지금 그 안에 있습니다. 기도는 들리지 않는 것 같고, 힘은 바닥나 가고, 지름길을 권하는 목소리들은 너무나 합리적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시오. 우리가 누구인지 일깨워 주십시오. 형편으로가 아니라, 실패로가 아니라, 세상의 점수판으로가 아니라 — 우리가 스스로 말할 수 있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 위에 말씀하신 그 이름으로.

모든 시련을 통해 우리를 빚어 주십시오. 뜻밖의 자리들로 천사들을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붙드는 것밖에 할 수 없을 때에도, 붙들 용기를 주십시오.

힘이 아니라 신뢰로 시험을 이기신 신실한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 우리를 용서와 기쁨과 소망의 사람으로 빚어 주십시오. 아멘.

“폭풍우 가운데에서도 나 주를 찬양하리” · 사순절 첫째 주일, Year A · 2026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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