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노래는 복수의 노래입니다.
시편이 아닙니다. 창세기로 겨우 네 장 들어간 자리 — 아직 성전도, 제사장도, 찬양 한 줄도 없는 자리에서 — 라멕이라는 사람이 두 아내를 불러 놓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창세기 4:23–24 (개역개정)
칠십칠. 사람이 얼마만큼 되갚을 수 있는지를 두고 성경이 처음으로 붙인 숫자입니다. 그것은 자랑이자 계산이었고, 이야기의 꽤 긴 구간 동안 사람에게 있던 유일한 숫자였습니다.
셈을 끝내는 숫자
이천 년이 지나, 한 어부가 넉넉해 보이려고 애쓰며 예수께 나아옵니다. 그는 바로 앞 장면 —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 — 를 들은 참이고, 그 이야기가 그를 크게 만들고 싶게 했습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마태복음 18:21–22 (새번역)
그 시대 랍비들은 세 번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두 배 넘게 올려 놓고, 칭찬을 기대합니다.
돌아온 것은 라멕의 숫자였습니다. 제자들이 읽던 헬라어 성경에서 라멕의 입에 붙어 있던 바로 그 표현이, 살인자의 입술에서 떼어져 정반대의 것에 걸립니다. 세상의 첫 노래가 복수를 세던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비를 세십니다 — 그것도 그 살인자가 쓰던 단위로 말입니다.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로 옮깁니다. 헬라어 표현은 창세기 4장 24절의 그것과 같은 말이며, 이 설교는 그 연결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지나치기 쉬운 조용한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도를 올리신 것이 아닙니다. 계수기를 치우신 것입니다. 일흔일곱을 향해 아직도 눈금을 세고 있다면, 그 문장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일만 달란트
한 임금이 셈을 밝히는데, 일만 달란트를 진 종이 끌려 나옵니다.
한 달란트는 육천 일의 품삯이었습니다. 그것이 일만이면 이십만 년치 노동에 가깝습니다. 이 숫자는 큰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얹혔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습니다.
“참아 주십시오. 내가 다 갚겠습니다.”마태복음 18:26 (새번역)
그가 무엇을 구하는지 보십시오. 용서가 아닙니다. 시간입니다. 그는 여전히 계산 안에 있습니다 — 머릿속으로 셈을 하고 있고, 화요일이 충분히 많으면 언젠가 갚아 낼 수 있으리라고 아직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자가 끊어지도록 불쌍히 여긴 임금은 — 마태가 쓴 단어는 몸으로 느끼는 말입니다 —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빚을 없애고 그를 놓아 줍니다. 그는 기한을 구했고, 재산 전부를 안고 걸어 나왔습니다.
남의 입에서 들려온 자기 기도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그것은 적은 돈이 아닙니다. 백 일의 품삯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짜 빚이고, 실제로 갚아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한 시간 전에 찢어진 그 액수의 육십만분의 일쯤 됩니다.
그가 상대의 목을 잡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무너져 내리며 말합니다.
“참아 주십시오. 내가 갚겠습니다.”마태복음 18:29 (새번역)
똑같은 말입니다. 자기 기도가 남의 입에서 나오는데 — 그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그 사람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둡니다. 그것은 영원히라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람이 자기 문장을 듣고도 왜 알아보지 못할까요. 그가 그 문장을 한 번도 그만둔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탕감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연장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직 갚는 중이라고 믿는 사람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거두어들입니다. 존 웨슬리는 꾸밈없이 말했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받기 위해 치르는 값이 아니라, 용서가 나에게 도착했다는 증거라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결말
임금은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고,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이고, 오랫동안 잘못 읽혀 온 구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하에 두신 고문실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짓고 스스로 옥졸까지 고용한 감방에 대한 묘사입니다. 빚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은 이미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문은 처음부터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이 본문이 정확히 반대편 사람들에게 겨누어져 온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대수롭지 않았던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감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받아 낼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고, 그 외의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 여섯 절 앞에서 같은 장이 말합니다.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이 본문은 상처 입은 사람을 치는 데 쓰이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그럴 힘이 어디서 오는지는 창세기의 반대쪽 끝에 있습니다. 구덩이로부터 십칠 년 뒤입니다.
야곱이 죽었습니다. 형제들은 겁먹은 사람들의 계산을 하고, 자기들과 복수 사이를 막고 있던 유일한 것이 방금 땅에 묻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먼저 사람을 보내 전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 네 형들을 용서하라.
야곱이 그렇게 말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십칠 년 동안 요셉의 양식을 먹고도, 그들은 여전히 죽은 사람의 입을 빌립니다.
그리고 요셉이 웁니다. 구덩이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제 형제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러고 나서 이 이야기 전체가 걸어온 그 문장을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세기 50:19–20 (개역개정)
그는 그 죄가 작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자리가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해하려 한 뜻과 선으로 바꾸신 뜻은 서로 다른 판결이고, 그중 하나만이 애초에 그가 내릴 몫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같은 말을 한 줄로 합니다. 그 편지에서 가장 자유롭게 하는 문장입니다. 그 자리에는 이미 앉으신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내려오셔도 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여덟 주간의 안식을 앞둔 마지막 주일에 전했고, 제가 사랑하는 회중 앞에서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그렇게 긴 계절을 용서하지 못한 것을 안고 건너지 마십시오. 그 감방은 여러분 이름으로 임대되어 있고, 그 월세는 여러분의 삶이며, 결코 갚을 수 없던 것을 이미 갚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 가지고 나가실 질문은 이것입니다. 평범한 화요일에도 물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질문이고, 지금 여러분이 목을 잡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그는 시간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보이고 있고, 사랑받고 있으며, 은혜는 여러분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치는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는 여전히 시간을 구하며 들어왔는데, 주님은 재산 전부를 우리 손에 쥐여 주셨습니다. 아직도 갚는 사람처럼 걸어 나가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누군가의 목을 잡고 있는 자리에서 우리 손을 펴게 하소서. 상처 입은 자리에서는 우리를 지켜 주소서. 그 자리가 우리 자리가 아님을 가르쳐 주소서. 이 회중이 서로에게 부드럽고, 놓아주기에 빠르며, 세는 일에는 더디게 하소서.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를 가져다가 자비의 노래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그 노래를 불러 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