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기쁨, 전하는 복음”
강영훈 목사
부활주일 · Year A · 2026년 4월 5일
요한복음 20:1–18 (개역개정)
오늘 아침, 저와 함께 걸으시길 바랍니다. 교리 속으로가 아닙니다. 논증 속으로도 아닙니다. 어느 동산 속으로, 어둠 속으로, 마리아라는 한 여인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이른 시각입니다. 동트기 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가는 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어둡다고 말할 때, 그는 단지 시각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상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어둠은 언제나 의미가 있습니다. 아직 빛이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금요일에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견뎌 냈습니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끔찍한 날,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약속도 없고, 오직 침묵뿐인 날. 그리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단 한 가지 일을 하러 갑니다. 시신을 돌보는 일입니다. 삶을 의미 있게 해 주던 사람을 잃고 나면, 때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몸을 일으켜 해오던 대로 움직이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 돌이 옮겨져 있습니다. 시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첫 생각은 기적이 아닙니다. 도난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그것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슬픔이 아는 유일한 셈법일 뿐입니다.
그녀는 달려가 다른 이들에게 알립니다. 베드로와 사랑하시던 제자가 무덤으로 달음질칩니다. 세마포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따로 개켜져 있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도굴꾼은 세마포를 개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슬픔이 마련해 주는 범주 안에는 들어맞지 않는 무언가가.
그러나 두 제자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증거를 보고도 떠납니다.
마리아는 아닙니다.
마리아는 머뭅니다. 무덤 곁에 서서 웁니다. 조용한 울음이 아닙니다. 요한은 온몸이 흔들리는 통곡을 뜻하는 단어를 씁니다. 이 본문에서 그 말을 세 번 반복합니다. 세 번. 우연이 아닙니다. 이 여인의 슬픔이 부활이 자라날 토양이라는 것을, 요한은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사십 일 동안 우리 공동체도 나름의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재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마른 뼈들을 이름 불렀습니다. 지난주에는 그릇이 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침묵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리아처럼, 사랑하던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자리에 서서, 무엇이 남아 있기는 한지 묻고 있습니다.
이제 마리아가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시신이 있던 자리에 두 천사가 앉아 있습니다. 천사들이 묻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그녀는 베드로에게 했던 대답을 그대로 합니다. 슬픔은 그녀에게 단 한 문장만을 주었고, 무언가 달라질 때까지 그녀는 그 말을 반복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몸을 돌립니다. 누군가 서 있습니다. 동산지기라고 생각합니다.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동산지기’라는 짐작은 그녀가 아는 것보다 더 옳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첫 아담은 동산에 놓였다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아담이 동산에 서 있고, 모든 것이 회복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그녀의 대답이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그녀는 여전히 시신을 찾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죽은 이를 찾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이 아직 걷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한 마디를 말씀하십니다.
“마리암아.”
격식을 갖춘 이름이 아닙니다. 마리암 — 그녀의 모국어로 들리던 그대로의 소리. 집의 언어. 자라며 듣던 그 소리. 그리고 그 한 음절에 — 모든 것이 바뀝니다. 그녀는 그분을 바라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봅니다.
“랍오니!”
나의 선생님. 떠나갔다고 생각했던 그분. 그것은 신조가 아닙니다. 신학 시험 답안도 아닙니다. 자기 삶에 의미를 주었던 목소리를 알아본 사람의 소리입니다.
이 복음서에서 부활은 그렇게 일합니다. 머리로 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증거를 따라 도달하는 것도 아닙니다 — 개켜진 세마포가 길을 가리키긴 했지만. 찾아냄을 당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가장 깊은 슬픔의 자리로 걸어와 곁에 서시고, 아무도 부를 줄 모르는 그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자리에서 당신만의 빈자리를 바라보고 계시다면 — 무너진 결혼이든, 진단서든, 조용해진 소명이든 — 들으십시오. 그분은 당신이 모든 것을 먼저 정리하기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미 동산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곧, 당신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마리아는 당신과 제가 했을 그대로 합니다. 그분을 붙듭니다.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그녀를 밀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녀가 전에 알던 예수님 — 먼지 이는 길을 나란히 걷던, 저녁 모닥불 너머로 목소리가 들리던 그분 — 그 관계가 더 큰 무엇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나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한 곳에 머무는 그분만을 붙들고 있는 한, 그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다음에는 친구로 올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 그들을 형제라 부르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입양했습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친구조차 아닙니다. 가족입니다.
우리의 사순절 여정이 준비시키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릇은 버려지려고 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금이 스며들도록 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형제라, 자매라 부르시고 — 그분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바꾸는 말은 따로 있습니다. 마리암도 아니고, 랍오니도 아닙니다. 그다음에 오는 말입니다. 가라.
“내 형제들에게 가라.”
마리아는 어둠 속에서 조문객으로 무덤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첫 증인이 되어 떠납니다. 그녀의 슬픔은 지워진 것이 아니라 — 방향을 얻은 것입니다. 목적지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 본문 전체가 우리에게 청하는 움직임이 그것입니다. 의심에서 확신으로가 아닙니다 — 본문은 그보다 정직합니다. 슬픔에서 기쁨으로도 아닙니다 — 부활절은 기분이 아닙니다. 그 움직임은 붙듦에서 보냄으로입니다. 있었던 것을 붙드는 자리에서, 지금 있는 것을 들고 보내지는 자리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어둠이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셨고, 형제라 부르셨고, 자매라 부르셨고, 세상이 죽도록 듣고 싶어 하는 무언가를 당신 손에 들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갑니다. 제자들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오직 중요한 한 가지를 말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그것이 부활절의 증언입니다. 설명이 아닙니다. 증언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셨다. 나는 알았다. 그리고 이제 너희에게 말한다.
가서, 전하십시오.
기도
첫 아침과 새 창조의 하나님, 마리아가 나아왔듯 우리도 나아갑니다 — 어둠 속에서, 슬픔을 안은 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아직 보지 못한 채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잃어버린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들 밖으로 우리를 불러내 주십시오. 우리의 붙듦을 보냄으로, 우리의 슬픔을 증언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주에 만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마리아의 말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내가 주를 보았노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