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침묵의 주”
강영훈 목사
성금요일 · Year A · 2026년 4월 10일
요한복음 18–19장 (개역개정)
성금요일은 교회가 서둘러 해결로 나아가지 않는 단 하나의 예배입니다. 오늘 밤에는 축도가 없습니다. 그 날 선 모서리를 무디게 할 “그래도 부활절이 옵니다”도 없습니다. 우리는 일어난 일과 함께 앉습니다. 침묵이 내려앉게 둡니다.
요한은 수난을 다른 복음서들과 다르게 전합니다. 마가에서 예수님은 버림받음의 절규를 토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요한에서 우리가 받는 것은 더 차갑고 더 낯선 것입니다 — 죽어 가시면서도 주권자이신 예수님. 끝까지 통제를 쥐고 계신 분. 그리고 그것이 그 뒤에 오는 것을 — 침묵을 — 더욱 어지럽게 만듭니다.
군병들이 동산으로 그분을 잡으러 옵니다. 유다가 횃불과 무기를 들려 앞장섭니다. 도망칠 법한, 숨거나 흥정하거나 애원할 법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 요한복음 18:4–6 (개역개정)
에고 에이미(egō eimi) — 밤의 동산에서 말해진 신의 이름. 그리고 군병들이 얻어맞은 듯 뒤로 넘어집니다. 체포당하는 이가 체포하는 현존이 됩니다. 결박당하는 이가 권능의 근원이 됩니다. 빌라도는 나중에 “진리가 무엇이냐” 물을 것입니다 — 진리 그 자체와 같은 방에 서서,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사로잡히신 중에도, 통제를 쥐고 계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여섯 시간 뒤. 어둠의 일이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두 죄수 사이에 달려 계십니다 — 벗겨지고, 드러나고, 비워진 채. 그런데 그분의 마지막 말은 고통의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 요한복음 19:30 (개역개정)
테텔레스타이(tetelestai). 다 이루었다. 완성되었다. 성취되었다. 패배의 말이 아닙니다. 헐떡임이 아닙니다. 선언입니다. 일이 끝났다는. 그분은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십니다. 끝까지 목적을 지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 침묵. 몸이 내려집니다. 세마포에 싸입니다. 동산 무덤에 뉘입니다. 돌이 굴려집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그저 멈춥니다.
오늘 밤 우리는 부활절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예배의 절제입니다. 그것이 이 예배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재하신 듯한 침묵 속에 앉습니다. 십자가가 헐벗은 채 서 있는 자리. 무덤이 봉해져 있고 아직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자리.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 예수님이 통제를 놓으신 적이 없다는 것을 요한은 분명히 합니다 — 어떤 것들은 오직 어둠 속에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진리들은 알지-못함의 흙에서만 뿌리를 내립니다.
돌은 굴려졌습니다. 파수꾼이 세워졌습니다. 이야기는 끝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다립니다 — 벌로서가 아니라 연습으로서. 아직 볼 수 없는 것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길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