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orY
설교

“옹기장이 하나님”

The Broken Vessel

강영훈 목사
고난주일 · Year A · 2026년 3월 29일
시편 31편 · 빌립보서 2:5–11 (개역개정)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 · 사순절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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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일 “옹기장이 하나님” 3월 29일
고난주간
부활절

킨츠기(金継ぎ)라는 일본의 공예가 있습니다 —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잇는 수선법입니다. 그릇이 산산조각 나면, 장인은 그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금가루를 섞은 옻으로 조각들을 다시 붙입니다. 그러면 갈라졌던 금(線) 하나하나가 빛나는 이음매가 됩니다. 깨어진 자리가 그릇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A Japanese kintsugi bowl — dark ceramic repaired with golden seams
킨츠기 — 금으로 잇는 수선

오늘의 본문들이 — 시편 기자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에 대해 — 드러내는 것은, 깨어짐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어짐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열린 틈입니다.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 케노시스(kenosis) — 자기 비움 — 이고, 이것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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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그릇”

시편 기자는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시편 31편의 언어는 가차 없이 육체적입니다. 근심으로 쇠하는 눈, 다한 영혼과 몸, 꺼져 가는 뼈. 이것은 사람 전체를 삼키는 고통입니다 — 몸과 영을 함께. 성경은 우리가 훈련받은 방식처럼 그 둘을 갈라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참상은 육체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회적입니다. 시편 기자는 대적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고, 이웃들에게 공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길 건너편으로 피합니다. 그는 기억에서 지워졌습니다 —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이.”

그리고 이 설교에 이름을 준 심상이 옵니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 시편 31:12 (개역개정)

박살 난 항아리. 고대 세계에서 깨진 질그릇은 폐물이었습니다 — 성벽 밖 무더기에 던져 버리는 것. 고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습니다. 끝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중에는 그 느낌을 아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詩)로서가 아니라 주소로서. 담도록 지어진 모든 것이 갈라진 틈으로 쏟아져 나가던 그 계절.

그러나 시편 기자가 다음에 하는 일을 보십시오. 14절입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 시편 31:14–15 (개역개정)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적들은 여전히 꾀하고, 몸은 여전히 쇠합니다. 그리고 그 달라지지 않은 폐허 속으로, 시편 기자는 선언합니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깨진 그릇이 자신을 — 조각들째로 — 하나님의 손에 놓습니다. 먼저 구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을 청하면서. 주의 얼굴을 내게 비추소서. 여기서도. 깨진 채로도.

누가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 시편을 인용하셨다고 전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깨진 그릇의 기도가 죽어 가시는 구주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이 시편은 그 모든 세기 동안, 그것을 끝까지 기도할 한 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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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바울은 초대교회의 찬송 하나를 우리에게 보존해 줍니다 — 누군가 복음서를 쓰기도 전에 교회가 이미 부르고 있던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 찬송은 스스로 깨진 그릇이 되기로 택하신 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 빌립보서 2:6–7 (개역개정)

케노시스. 자기 비움. 이것이 열쇠 되는 말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역설의 방식을 여는 열쇠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비움은 뺄셈이 아닙니다. 더하심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상처받을 수 있음을 얻으셨습니다. 언제나 그러하셨던 것을 그치지 않으신 채, 그렇지 않으셨던 것이 — 인간이, 고난에 놓인 자가, 깨어질 수 있는 자가 — 되셨습니다. 그릇이 스스로의 산산조각 남을 택한 것입니다.

그 찬송은 숨이 멎도록 가차 없는 내리막을 그립니다. 하나님의 본체에서 종의 형체로, 사람의 모양에서 낮아지심으로, 죽기까지의 복종 — 십자가에 죽으심까지. 걸음마다 더 내어놓습니다. 본성이 하나님이신 분이, 세상이 배정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시기까지.

이사야는 수 세기 전에 이것을 보았습니다. 종의 노래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그들이 빼앗았다”가 아닙니다. 내가 맡겼다입니다. 그 고난은 바쳐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 그것을 바칠 수 있는 것은 그 앞에 오는 것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깨어짐을 견디는 힘은 날마다 듣는 훈련에서 흘러나옵니다 —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바로 그 말에서.

The temple curtain torn in two from top to bottom, divine light streaming through the tear
휘장이 찢어졌다 — 깨어짐이 곧 열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리막의 바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태가 전합니다.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두어 두던 그 가림막을 — 하나님이 찢어 여셨습니다. 그릇이 완전히 부서진 그 순간,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 속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깨어짐이 곧 열림이었습니다.

이것이 케노시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는 사랑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에는 다음에 오는 것을 가리키는 단 한 단어가 있습니다. 이러므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십자가에도 불구하고가 아닙니다. 십자가 때문에. 영광은 갈라진 틈을 통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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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틈의 금”

여기, 믿음의 한복판에 있는 역설이 있습니다. 잘못 말하기 쉬운 것이라, 조심스럽게 이름하고 싶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훈을 주시려고 그릇을 깨뜨리지 않으십니다. 킨츠기 장인은 그릇을 깨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깼거나, 떨어진 것입니다. 장인은 그 조각들을 주워 드는 분입니다.

그런데 장인이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갈라진 틈을 금으로 채웁니다. 균열의 선들을 감추지 않습니다. 깨어진 일이 없었던 척하지 않습니다. 깨어짐 그 자체를 그릇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바꿉니다. 그릇은 산산조각 나지 않았다면 결코 될 수 없었을 무언가가 됩니다 — 전보다 덜한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한 것이.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십니다. 케노시스의 무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한 그분의 뜻과 계획을 십자가를 피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해서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그릇이 깨어졌고, 그 갈라진 틈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둘 수 없이 세상에 쏟아졌습니다. 파괴처럼 보였던 것이 탄생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 고난을 일으키심으로가 아니라, 고난이 마지막 말이 되기를 거절하심으로. 나를 실격시켰다고 여긴 삶의 갈라진 금 하나하나 — 모든 실패, 모든 슬픔, 담도록 지어진 것을 담을 수 없던 모든 계절 — 를 하나님은 손에 받아 들고 금으로 채우십니다. 상처가, 사랑이 다른 누군가에게 가닿는 통로가 됩니다.

제가 이것을 아는 것은, 살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쌓아 온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던 계절이 있었고, 저는 그릇이 끝났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시편 기자가 이미 알던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놓인 깨진 그릇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채워집니다. 케노시스 — 마치 내 생명인 양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는 일 — 는 상실이 아니었습니다. 발견되는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문법입니다. 하나님이 깨어짐을 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 그 명장(名匠)이 — 깨어짐을 금빛으로 온전한 무언가로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케노시스는 영광으로 가는 길의 우회로가 아닙니다. 길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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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kintsugi bowl with golden fire blazing through its cracks and emanating from within
그러므로.

그릇을 한 번 더 보십시오.

금빛 이음매 하나하나가, 무언가 산산조각 났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금빛 이음매 하나하나가, 지금 빛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시편은 말합니다. “내가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찬송은 말합니다. 케노시스. 그릇은 그 안에 있는 것이 세상에 가닿도록 스스로 깨어지기를 택했다.

그리고 그다음. 이러므로.

깨어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깨어짐 때문에. 이러므로 당신의 깨어짐은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열림입니다.

기도

깨진 그릇의 하나님, 우리는 움켜쥔 손과 금 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든 붙여 보려 애썼고, 지쳤습니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깨어짐을 두려워했습니다 — 그것이 우리가 끝났다는 뜻이라고, 버려졌다는 뜻이라고,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케노시스를 가르쳐 주십시오. 손을 펴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토록 꽉 쥐고 있던 것이 애초에 우리가 쥘 것이 아니었음을 — 그리고 놓는 것이 상실이 아니라 발견되는 일의 시작임을 — 보여 주십시오.

우리의 갈라진 틈에 주님의 금을 부어 주십시오. 깨진 자리들을 빛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고난을, 주님의 사랑이 세상에 가닿는 통로로 바꾸어 주십시오.

자기를 비우신 분, 우리를 위해 깨어지신 분, 그 상처가 지금도 빛나는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옹기장이 하나님” · 고난주일, Year A · 2026년 3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