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혀 주신 예복」
비유 하나 더
비유 하나가 더 있습니다. 같은 화요일에, 같은 사람들에게 — 그런데 이번에는 이야기가 뒤집힙니다.
두 주일 동안 그 성전 뜰에서 들려온 비유들은 무엇을 잃는 이야기였습니다. 예,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않은 아들. 포도원을 하도 오래 일구다 보니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소작인들. 두 이야기 모두 무언가를 빼앗겨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입을 여시자, 첫 문장이 잔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마태복음 22:1–2
하늘 나라가 무엇에 비유되는지 보십시오. 잔칫상도 아니고 손님 명단도 아닙니다. 무언가를 하는 임금 —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혼인인지도 보십시오. 방금 끝난 이야기에서 주인의 아들은 포도원 밖으로 내쫓겨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숨 돌릴 틈도 없이, 하늘 나라가 바로 그 아들의 혼인 잔치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내쫓은 아들이, 이 혼인 잔치의 주인공인 바로 그 아들입니다. 복음을 작게 접으면 이렇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일은 전부 임금이 하는 일입니다. 잔치를 차립니다. 보내고, 또 보냅니다. 잔치 자리를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 우리가 끝날 자리가 여기인데 — 손님들에게 옷을 입힙니다. 이야기 속에 딱딱한 대목들이 있지만,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두고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먼저 말해 주며 시작합니다.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푸시고, 그 자리가 가득 차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 하고 대답한 사람들
이 이야기에서 느닷없이 청함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세계에서 큰 잔치는 두 번 알려졌습니다. 몇 주 전에 심부름꾼이 초대장을 가져오면 받아들이거나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잔치 당일, 짐승을 잡고 빵을 구워 낸 다음, 두 번째 심부름꾼이 한마디를 들고 왔습니다. 지금입니다. 마태의 그리스어는 우리말이 매끈하게 다듬어 버린 한 구절에 그 관습을 담아 둡니다. 임금은 이미 초대받은 사람들을 부르러 종들을 보냅니다. 이 사람들은 벌써 예 하고 대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초대를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슬그머니 떨어뜨린 것입니다.
임금은 그것을 마지막 말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시 보내는데, 이번 전갈은 세세한 데까지 거의 다정합니다. 보아라, 내 잔치를 준비하였다. 내 소와 살진 짐승을 잡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너라. 이 문장의 동사 셋이 그리스어 완료 시제로 서 있습니다. 준비하였다, 잡았다, 되었다 — 끝난 행동이고, 그 결과는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이 잔치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청하기 전에 다 끝나 있습니다. 차림표까지 이사야의 것입니다 — 기름진 것으로 차린 잔치 — 오래된 약속이 상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떠나가서,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어 낱말의 뜻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입니다. 적의가 아닙니다. 심부름꾼과 다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더 급한 일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십시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장사로. 땅과 장사 — 그 세계에서 누구라도 성실하고 책임 있는 삶이라고 불렀을 두 가지입니다. 두 사람 다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밭은 일구어야 하고, 장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로즈웰에 가장 가까이 오는 구절입니다. 이번 주에 하나님을 거절하며 지낼 사람은 여기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하게 될 일은 밭으로 가는 것입니다 — 일정, 집안일, 직장, 약속들, 손주들, 정직하게 우리가 돌보아야 할 백 가지 좋은 일들. 그렇게 약속을 떨어뜨리기로 작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바빠지고, 두 번째 심부름꾼은 하필 다른 데 가야 하는 날에 도착합니다.
마태는 복음서의 이 긴 대목 전체를 뜻을 나타내는 작은 동사 하나에 걸어 둡니다. 싫습니다 하고 말한 아들, 오려고 하지 않은 손님들, 그리고 두 장 뒤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는 예수님 —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가 아닙니다. 하지 않으려 했다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은혜는 한 번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모자라는 것은 원함입니다.
그리고 무관심에 대한 임금의 첫 대답을 보십시오. 군대가 아닙니다. 또 한 번의 초대입니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잔치 자리
초대받은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부름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한 짓을 합니다. 임금의 종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입니다. 그러자 비유가 갑자기 어두워집니다.
임금은 노하여, 자기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이것은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합니다. 여기서 침묵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여러 세기 동안 유대인들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구실로 쓰였고, 그런 사용은 본문에 대한 거짓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은 유대인 선생이고, 자기 예언자들의 목소리로 자기 도시를 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을 사랑했기에 예루살렘에 대해 모진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성전에서 말씀을 마치실 때, 마지막은 판결이 아니라 탄식입니다 —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애태우듯.
또한 정확히 누가 멸망당하는지 읽으십시오. 그 살인자들입니다. 자기 밭으로 간 사람이 아닙니다. 비유는 한눈판 사람들의 도시를 불사르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더 딱딱하게 만들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딱딱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를 언제까지나 놀라게 해야 마땅한 문장이 옵니다.
“그러니 너희는 네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종들이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래서 혼인 잔치 자리는 손님으로 가득 찼다.”마태복음 22:9–10
네거리로 옮긴 말은 길이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는 자리들을 가리킵니다 — 갈림길, 변두리, 아무 명단에도 없는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리고 마태의 그리스어에서 순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입니다. 악한 사람이 먼저 옵니다.
예수님은 전에 이 그림을 한 번 그리신 적이 있습니다. 온갖 고기를 모으는 그물 이야기입니다. 가려내는 일은 나중에 오고, 그것은 어부의 일이 아닙니다. 임금의 종들은 문 앞에서 아무의 이력도 살피지 않습니다. 자리를 채우라는 말을 들었고, 그대로 채웁니다.
예배당 의자에 앉아 자기가 과연 여기 있어도 되는지 조용히 셈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연필을 내려놓아도 됩니다. 그 잔치 자리에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자리는 누군가 초대장을 들고 달려왔을 때 마침 길가에 서 있던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그것이 손님 명단입니다. 처음부터 그것이 손님 명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두 번째 생각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몇 세기 전에 이미 그것을 보았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산에서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 갈림길로 달려가는 종들은 첫 손님들이 오지 않자 꺼내 든 대안이 아닙니다. 처음부터의 계획이 마침내 도착한 것입니다. 임금은 오려 하지 않은 사람들을 원하기를 그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빈자리가 아들의 혼인 잔치를 텅 비게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그리고 이야기가 가득 찬 잔치 자리와 기뻐하는 임금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바로 그때, 아무도 바라지 않는 일을 합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갔다가, 거기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묻기를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하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마태복음 22:11–12
우리의 본능은 그를 변호하는 것입니다. 길에서 휩쓸려 들어온 사람인데, 혼인 예복을 가지고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장면을 천천히 읽으십시오. 임금은 그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 마태복음에서 이 말은 한 번도 따뜻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딱 한 번 더 쓰시는데, 동산에서, 유다에게입니다.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놓아 버린 사람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임금은 왜 그런 차림인가 하고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하고 묻습니다 — 분명히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 던지는, 속해 있음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리스어는 거의 몸으로 느껴지는 말입니다 — 재갈이 물렸다, 소에게 물리는 재갈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그는 대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 침묵이 이 장면의 열쇠입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할 말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제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데려온 그대로 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고, 그 말이 옳았을 것이고, 이야기는 임금에게 불리하게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가 침묵하는 것은 문 앞에서 무언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그것을 지나쳐 걸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중요한 옷은 집에서 가져오는 법이 없습니다. 지급되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대제사장이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 더러운 옷을 벗겨라 하는 명령을 들었고, 그다음 약속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예복을 입히겠다. 바울은 썼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 맨 끝,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고 서 있는데, 본문은 거기서 멈추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다고.
허락하셨다. 주셨다. 그런 다음 요한계시록은 그 모시 옷이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덧붙입니다. 그 옷은 선물이고, 또한 삶입니다. 문 앞에서 손에 쥐여지고, 그다음에는 그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감리교에 가장 가까워지는 대목이 바로 여기입니다. 존 웨슬리는 생애 마지막에 쓴 설교 가운데 하나에서 바로 이 예복을 다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누구에게든 잔치 자리를 주는 것이고, 거룩함 — 새로워진 마음과 삶 — 은 그 선물을 실제로 입었을 때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어 입는 옷도 아니고, 끝내 입지 않는 꼬리표도 아닙니다. 받아서, 그다음 살아 내는 하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후반부는 복장 규정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점잖아 보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며, 감히 교회에 오기 전에 몸단장부터 하고 오라고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설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정반대를 설교한 것입니다. 예복은 거저였습니다. 문 앞에 있었습니다. 임금의 것이었습니다. 예복 없이 발견되는 유일한 길은 들어오는 길에 그것을 사양하는 것뿐입니다 — 잔치는 원하면서 주인은 거절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 —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 조차 몇 명이나 구원받을지 따지는 셈이 아닙니다. 그 구절은 그러므로라는 작은 접속어 하나에 매달려, 이 한 사람과 그의 빈 대답을 가리킵니다. 그 잔치 자리의 모든 사람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갈림길에서 온 낯선 사람들도 — 한 사람도 빠짐없이.
두 벌의 옷
두 절반을 합쳐 놓으면, 무르지도 않고 잔인하지도 않은 무언가가 나옵니다. 초대는 거저이고, 터무니없고, 가리는 것이 없습니다 — 길가에 서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 자격도 묻지 않고 건네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문 앞에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의 말을 한 번 더 들어 보십시오. 그 잔치가 차려진 산 위에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들어 보십시오.
“주님께서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을 덮고 있는 수의와 모든 민족 위에 펼쳐진 덮개를 없애실 것이다.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이사야 25:7–8
수의도 옷입니다 — 온 세상이 입고 있던 옷, 죽은 이의 얼굴 위에 덮는 천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무덤가에서 읽는 말씀이고, 이 교우들 가운데 더러는 아주 최근에 그 말씀이 읽히는 것을 들었습니다. 거기서 이 말씀은 시로 읽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약속으로 읽힙니다. 하나님은 수의를 느슨하게 풀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없애 버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마침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내려앉습니다. 그 산을 걸으시며 모든 민족의 얼굴에서 수의를 걷어 내시는 하나님이, 깨끗한 모시 옷을 팔에 걸치고 아들의 혼인 잔치 문간에 서 계신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 아무것도 없이 길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위해서.
그분은 세상에서 죽음의 옷을 벗기십니다. 우리에게 혼인 예복을 입히십니다.
잔치는 준비되었습니다. 자리는 가득 찼습니다. 예복은 문 앞에서 주어졌고, 이미 여러분의 어깨 위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는 아직 여러분과의 일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맺는 기도
잔치의 하나님, 주님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올 생각을 하기 전에 상을 차리셨고, 길 끝까지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찾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었는데도, 지금 여기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약속에 늦게 만드는 좋고 평범한 일들을 — 밭과 가게와 빼곡한 달력을 — 용서하여 주십시오. 문 앞에서 우리 어깨에 얹어 주신 모시 옷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주신 것이 우리 나날의 모양이 될 때까지, 그 옷을 입고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 앞에 설 때, 주님이 이미 세상의 얼굴에서 수의를 걷어 내고 계심을 기억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죽음을 영원히 삼키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그날까지, 우리를 아들의 식탁에 머물게 하여 주십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